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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양성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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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孫氏)의 시조(始祖) 손순(孫順)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公)

※ 시호(諡號) : 덕망이나 지위가 높았던 사람이 돌아가신 뒤에 나라에서 내려주는 호칭

 

아래 내용은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권지상(卷之上)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공(公)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때 모량부(牟梁部)에 살았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로 연명(延命)하면서도 노모(老母)를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봉양(奉養)하였다.

 

그런데 공(公)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어 매양 앙탈을 부려서 노모(老母)가 잡수실 것을 빼앗아 먹어버리기 때문에 노모(老母)는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므로 공(公)이 이를 민망히 여겨서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다”하고 그 어린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려고 취산(醉山, 일명 취향산(醉鄕山)) 북쪽 완호평(完乎坪)에 가서 땅을 파다가 석종(石鍾)을 얻게 되었다.

 

공(公)은 그것을 하늘이 아이에게 내린 복(福)이라 생각하고 아이를 도로 업고 그 석종(石鍾)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그것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청아한 소리가 대궐(大闕)에까지 들렸다.

 

왕(王)이 이를 듣고 하늘이 그의 효성(孝誠)에 감응(感應)하여 내린 이적(異蹟)이라하여 집 한 채를 내리고 벼 오십석(五十石)을 주어 그 효(孝)를 숭상(崇尙)하니 이때가 흥덕왕(興德王) 을묘(乙卯) 835년이었다.

 

공(公)이 옛 집을 희사(喜捨)하여 홍효사(弘孝寺)로 삼고 그 석종(石鍾)을 매달아 두었는데 진성왕(眞聖王) 때 적고적(赤袴賊)의 침량(侵掠)으로 석종(石鍾)의 행방(行方)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내용의 출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경지(東京誌) 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이다.

 

밀양손씨(密陽孫氏)의 관조(貫祖) 손긍훈(孫兢訓)

 

처음으로 밀양(密陽)을 본관으로 삼아 손씨의 계통을 이은 분으로, 밀양손씨의 관조(貫祖)

고려 왕실로부터 광리군(廣理君)이라는 작위(爵位)를 받으셨다.

※ 본관(本貫) : 같은 성씨의 계통적 출신 지역

※ 관조(貫祖) : 한 성씨가 처음으로 특정 지역을 본관으로 정한 선조(先祖) 

※ 작위(爵位) : 생전에 왕이 귀족·공신·왕족 등에게 내리는 신분적 칭호

 

아래 내용은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권지상(卷之上)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병신(丙申) 936년에 백제왕(百濟王) 신검(神劍)을 황산(黃山)에서 격파(擊破)할 때 선봉대장(先鋒大將)이 되어 그를 생포(生捕)한 훈공(勳功)으로 광리군(廣理君)에 책봉(策封)되고 삼중대광 사도상장군(三重大匡 司徒上將軍)에 오르니 공명(功名)이 당세(當世)에 으뜸이었다.

 

읍인(邑人)이 그 공덕(功德)을 추모(追慕)하여 추화산정(推火山頂)에 성황사(城隍祠)를 세워 소상(塑像)을 봉안(奉安)하고 춘추(春秋)로 밀양관부(密陽官府)에서 향사(享祀)를 받들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경진(庚辰) 1580년에 밀양성내(密陽城內) 신당말리에 이건(移建)하였고, 현종(顯宗) 갑인(甲寅) 1674년에 또 남림(南林) 가운데로 이건(移建)하여 향사(享祀)를 받들다가 고종(高宗) 을해(乙亥) 1875년에 다시 추화산(推火山) 성황사(城隍祠) 구지(舊址)의 추화사(推火祠)로 이향(移享)하였는데, 갑오(甲午) 1894년에 관향(官享)이 폐지(廢止)되니 비로소 후손(後孫)들이 향사(享祀)를 받들게 되었다.

 

갑자(甲子) 1924년에 후손(後孫)들이 성황사(城隍祠) 구지(舊址)에 석조사우(石造祀宇) 창훈각(彰勳閣)을 중건(重建)하여 봉향(奉享)하다가 무자(戊子) 1948년 2.7 폭동으로 관(官)의 철거령(撤去令)이 내려 지금의 춘복재(春福齋)로 옮겼다.

 

경인(庚寅) 1950년에 현충사(顯忠祠)를 짓고 소상(塑像)을 이봉(移奉)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신사(辛巳) 2001년 춘향(春享)부터 다시 밀양시(密陽市)가 관향(官享)을 한다.

 

밀양손씨(密陽孫氏) 양성공파(陽城公派)의 중시조(中始祖) 손을상·손병상

 

광리군(廣理君) 손긍훈의 5세손인 밀성군 손빈(孫贇, 1280년대 출생 추정)까지의 계보는 확인됩니다. 그러나 밀성군 손빈 이후 약 3~4대에 해당하는 계보 기록은 훼손되어 전하지 않습니다. 그 후 다시 기록이 확인되는 선조는 손을상(孫乙相)·손병상(孫丙相) 형제분으로, 이분들은 1350년대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형제분의 이름이 각각 을상(乙相)과 병상(丙相)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갑상(甲相)이라는 이름의 맏형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1688년(조선 숙종) 후손들은 시조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으로부터 당시까지의 계보를 수집·정리하여 초보(草譜)를 작성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738년(조선 영조)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를 완성하였습니다. 당시 손을상·손병상 형제분의 부친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보 편찬 과정에서 두 분을 각각 중시조(中始祖, 1世)로 모시기로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후손들은 손을상을 양성공(陽城公), 손병상을 울주공(蔚州公)으로 높여 불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양성공파와 울주공파의 후손들은 각각 양성공의 몇 세손, 울주공의 몇 세손이라고 합니다.

 

※ 보다 자세한 내용은 [밀양손씨 양성공파].[유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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