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密陽孫氏) 양성공파(陽城公派)
1. 밀양손씨 본관의 유래
손(孫)씨는 신라 초기 육부(六部)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며, 시조(始祖)는 신라 흥덕왕(서기 826~835년) 때의 인물인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입니다.
손씨는 후손이 번성함에 따라 여러 본관으로 분파되었으며, 그 가운데 밀양(密陽) 손씨는 고려 시대의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兢訓)에서 고려 말의 밀성군(密城君) 손빈(贇)에 이르기까지 밀양을 본관으로 삼아 온 데서 비롯된 것으로, 곧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孫兢訓)의 후손들입니다. 또한 밀양(密陽)의 옛 이름이 밀성(密城)이었던 데서, 밀양 손씨를 밀성(密城) 손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 밀양손씨 양성공파 족보의 유래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오던 밀양손씨 선조들의 여러 문헌과 기록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전란을 겪으며 상당 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눌암공(訥庵公) 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의 잿더미 속에서 불에 타다 남은 계보(系譜)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록 가운데 밀성군(密城君) 손빈(贇) 이후부터 양성공(陽城公) 손을상(乙相)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의 계보가 훼손되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선조들께서는 비교적 기록이 온전하게 전해지던 양성공(陽城公)과 울주공(蔚州公) 형제분을 중시조(中始祖, 1世)로 삼고, 당시 전해지던 각종 문헌과 고증 자료를 바탕으로 계보를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그 결과, 눌암공(訥庵公)의 장남인 돈산공(遯山公) 대인 1688년에 초보(草譜)가 편찬되었으며, 이어 돈산공 다음 세대인 1738년에 이를 정리하여 한 권의 보첩(譜牒)으로 간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의 시초입니다. 이후 세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일곱 차례의 증보(增補)를 거치며 내용을 보완하고 정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兢訓) : 고려시대 인물, 밀양손씨 관조(貫祖)
* 밀성군(密城君) 손빈(贇) : 생년을 1280년경으로 추정 (밀성군 이후 양성공 이전까지 계보는 실전됨)
* 양성공(陽城公) 손을상(乙相) : 1354년생으로 추정 → 양성공파의 중시조(中始祖)
* 울주공(蔚州公) 손병상(丙相) : 1356년생으로 추정 → 울주공파의 중시조(中始祖)
* 눌암공(訥庵公) 손봉후(奉後) : 1604~1657년, 양성공의 9세손
* 돈산공(遯山公) 손만정(萬禎) : 1628~1692년, 양성공의 10세손
※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본래 이름 앞에 ‘휘(諱)’를 붙이는 것이 예법입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름이 “○○”이라면 “휘(諱)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언어 사용 행태에서는 다소 번거로울 수 있어 이번 인터넷족보 편찬에 관련된 모든 안내 글에서는 이를 생략하였습니다.
※ 가계에서 후손을 가리킬 때는 보통 ‘○세(世)’ 또는 ‘○대(代)’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세’는 기준이 되는 조상을 1세로 정하고 그로부터 세대를 차례로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상을 기준으로 하면 그 아들은 2세, 손자는 3세가 됩니다.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후손은 ‘○○의 ○세손’과 같이 표현합니다. 반면 ‘○대’는 기준이 되는 조상으로부터 몇 세대 아래의 후손인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상을 기준으로 하면 그 아들은 1대, 손자는 2대가 됩니다. 전통 족보에서는 대체로 ‘○세’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3.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 발간 및 증보 연혁
• 1688년(무진戊辰, 조선 숙종) - 초보(草譜) 작성
• 1738년(무오戊午, 조선 영조) -「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완성, 1권
• 1791년(신해辛亥, 조선 정조) - 목판본 1권
• 1847년(정미丁未, 조선 현종) - 목판본 2권
• 1908년(무신戊申, 조선 순종) - 목판본 2권
• 1927년(정묘丁卯, 일제 강점기) - 활판본 3권
• 1954년(갑오甲午, 6.25 전쟁 직후) - 석판본 4권
• 1976년(병진丙辰, 한국 경제 도약기) - ○○본 ○권
• 2004년(갑신甲申, IMF 외환위기 회복기) - 평판(오프셋) 인쇄본 2권
* 1908년 무신보 편찬에 경산(慶山)의 주부공파(主簿公派)와 경주 대곡(大谷)의 울주공파(蔚州公派)가 참여하지 않아서, 무신보에는 이 두 파의 계보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 1927년 정묘보 편찬에 주부공파는 참여하였지만 울주공파는 이때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 1954년 갑오보 편찬에는 울주공파도 참여하였습니다.
※ 위의 모든 내용은 2004년 발간된「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정리한 것입니다.
※ 이번 인터넷족보에 관련된 모든 글에서는 2004년에 발간된「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를 갑신보(甲申譜) 또는 구보(舊譜)라고 부르겠습니다.
4. 우리 족보와 ‘밀양손씨 대동보’의 차이와 그 연원
1983년, 밀양손씨 여러 문중이 모여 ‘전국밀양손씨종친회’를 결성하고, 대동보 간행을 위하여 산하에 ‘밀양손씨 대동보 수보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중은 실전(失傳)된 선대(先代) 계보의 정리에 관한 견해 차이로 인하여 이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해당 단체에서 1984년에 발간한 ‘밀양손씨 대동보’에는 우리 문중의 계보가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현 ‘밀양손씨중앙종친회’는 ‘전국밀양손씨종친회’의 후신(後身)에 해당합니다.
우리「밀양손씨세보」에서는 밀성군 이후 실전된 몇 대의 계보를 공란으로 두고, 양성공과 울주공 형제분을 중시조(中始祖, 1世)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는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편, ‘밀양손씨 대동보’에서는 밀성군과 양성공 사이에 약 10여 대의 계보를 수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 밀양손씨 내 계통 구분과 우리 문중의 위치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밀양손씨세보(密陽孫氏世譜)」는 밀성군의 3세손 또는 4세손으로 추정되는 양성공과 울주공 두 형제분의 후손을 수록한 계보입니다. 따라서 우리 일족을 ‘밀양손씨 양성공·울주공파(派)’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칭은 다소 길어 통칭하기에 불편하였으므로, 윗대 선조들께서는 형이신 양성공을 대표로 하여 ‘양성공파’라 약칭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관례에 따라 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밀성군과 양성공 사이의 몇 대(代)에서 이미 여러 갈래로 분화된 후손들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다른 계파(系派)와 그들만의 족보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 계파는 ‘밀양손씨중앙종친회’에 가입되어 있고, 그 족보들은 해당 단체에서 발간한 ‘밀양손씨 대동보’에 합본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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